□ 순천의 3·1운동을 주도한 박항래 의사!
박항래 의사는 1919(기미)년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7일 지금의 남문다리에 위치했던 ‘연자루’에 올라 순천장날에 모여든 시민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선도한 독립투사다.
박항래 의사는 시위 도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19년 4월에 10개월의 형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그해 11월 3일 극심한 고문으로 옥중 순결했다.
1871년에 승주(昇州)에서 태어난 박항래(朴恒來)의사의 자는 인언(仁彦)이며 본관은 밀양(密陽), 1919년 순결할 당시 49세였다.
순천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부르짖던 박항래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순천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지난 2011년 8월 당시 연자루 위치였던 남문다리 옆에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다.
또한 1974년 후손들에 의해 죽도봉공원(竹島峰公園)에 선생의 행적을 기린 기적비(紀跡碑)가 세워졌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백강 조경한!
백강 조경한 선생은 1900년 7월 3일 주암면 한곡리 지금의 한동마을에서 부 조정순, 모 신마륜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921년 만주에 있는 ‘독립단’ 의 국내 지하공작 연락원으로 활약하다, 1926년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겨 ‘배달청년회’와 ‘배신학교’을 창설하여 교포들에게 애국항일사상을 고취 계도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일으킨 「9·18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군’을 조직할 당시, 선생은 수백 명의 ‘유격독립여단’을 이끌고 북만주와 동만주 등 객지에서 3년 동안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다, 임시정부가 진용을 확대하면서 선생은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선임, 이로서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일원이 됐다.
1944년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백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내공작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개헌기초위원,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동년 겨울에 임시정부 각료와 귀국 후 임시정부의 14개 정책을 국내에 반포하는 등 민족정기의 진흥에 전력했다.
1962년 3·1절에 정부는 선생에게 그동안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인정,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고, 1963년 11월에 실시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남 순천·승주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으로서 국방정훈에 크게 이바지 했다.
순천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2009년 금당공원 내 ‘백강 추모비와 조형물’을 설치하여 관리 중에 있으며, ‘3·1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허석 순천시장은 “정부는 2019년을 대한민국이 또 한 번 뜨겁게 응집할 수 있는 해로 준비하고 있다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데 순천시는 이에 적극 동참하여 순천출신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업적을 다시 한 번 28만 시민에게 알려 자긍심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순천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낙안 3·1독립만세 운동 테마공원 조성」, 「3·1독립운동 조형물 및 벽화 설치」,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 100주년에 걸맞는 품격 있는 3·1절 기념식 추진을 위한 「조선독립선언문 전달 과정 재현 자전거 퍼레이드」 및 시민과 함께하는 「3·1독립 길거리 만세운동 재현」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